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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대한 오마쥬

nalrari66-nomad of the present (blog.naver.com/nalrari66)

청계천은 서울 중심부에 흐르는 작은 하천의 이름이다그러나 청계천은 동시에 수백 개 이상의 공구상과 작은 공장이 밀집한 지명이기도 하다좁은 지역에 영세하게 얽기 설기로 엉켜있는 쇠를 다루는 작은 가게들이 은하수처럼 펼쳐져 있고그 종횡으로 자유방임적으로 밀집해 있는 구멍가게 규모의 공구상과 공장들이 탱크나 비행기까지 만들어내었다는 전설의 현장이기도 하다그러나 도심 재개발로 복개되어 버렸던 그 하천이 다시 열렸고 공구상이나 영세 공장은 가든 파이브나 다른 지역 공단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그리하여 청계천이 다시 그야 말로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박경근 감독은 그 촘촘한 상가와 공장이 청계천에 남아 있을 무렵에 청계천에 들어와서 청계천 메들리 프로젝트를 착수했다거기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일상을 찍는 다큐멘터리 제작과 청계천이 취급해 왔던 쇠에 대한 다채널 미디어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일 년 이상 청계천과 그 주변을 맴 돌면서 그들의 일상과 그 지역을 찍기 시작했는데정부의 청계천 복원 사업이 이미 뚵났을 무렵이었다복개되었던 하천 청계천은 억지로 바깥에서 물을 끌어들이면서까지 다시 복구되었지만그곳을 터전으로 사람들이 생활하던 공단으로서의 청계천은 밀려나 다른 곳으로 이전되려는 그 즈음에 박경근은 청계천 프로젝트에 뛰어들게 되어 청계천 공장들의 사실상 마지막 날을 기록할 수 있었다청계천이 사라지는 그 종언의 현장에서 박경근은 청계천의 기원을 보기 시작하였고그래서 그 마지막이 그저 마지막이라는 것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다큐멘터리는 기록하는 일이다눈앞에 벌어진 일을현실에서 전개되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새기는 일이다어원 자체가 문서나 증서를 뜻하는 다큐멘툼(documentum)에서 왔지만오늘 날은 사진과 영화비디오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실”을 기록하는 매체로 각광을 받아왔고 사용되고 있다다큐멘터리에서 현실은 기록된 현실(documented fact)이며 카메라에 찍힌 현실이고인화지나 스크린모니터에서 드러나는 현실이다그런데다큐멘터리에서 보여지는 그 현실이라는 것은 카메라에 새겨진 시각적 기록이라그 기록은 스크린이나 모니터브라운관 등 다른 매체를 통해서만 볼 수가 있는 것이다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현실이라는 것은 현실의 이미지이자 현실의 표상이지본래의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지도가 땅이 아니듯이 현실의 이미지가 현실 그 자체는 아닌 바로 그 지점에서 다큐멘터리는 보이려고 했던 바로 그 현실이 아닌 다큐멘티드된 현실만을 보여주는 것이다그로 인해 현실 자체가 찍히는 수동적 대상이 되고카메라 자체는 적극화되고 주체화되면서 이제 현실은 카메라적 현실로 되고카메라 장치를 통해 재현되는 현실이 되어버린다카메라로 기록하는 대상에 대한 카메라의 이러한 직접성과 적극성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속이는 방식이 되고카메라가 빚어낸 자연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이미지를 자꾸만 현실로 착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우리는 ‘카메라는 절대로 거짓을 하지 않는다고 쉽게 믿어버린다사실과 똑같은 외양을 재현하는사실에 대한 카메라의 주장이 시각적 거짓(visual lie)으로 귀결되면서다큐멘터리가 담보하고 있는 기록의 사실성도 카메라만큼이나 속임수 일 수밖에 없다따라서 다큐멘터리가 하나의 픽션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부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픽션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부르지 않는다어차피 다큐멘터리나 극영화가 픽션이기는 매 한가지이나그 둘의 구분은 어느 쪽이 더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인가에 달려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현실을 현실대로 보이려고 하는 태도나 의지그리고 표상으로라도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의 문제에 의거하는 것이다촬영 기법이나 편집 방식에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상호 모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방법적으로나 기술적으로야 다큐멘터리와 일반 극영화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그렇다고 제 3자적 시점이나관객에게 판단할 수 있는 열린 결말이라던가시점의 몰관심성 등 다큐멘터리적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다큐멘터리의 장치만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다큐멘터리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위와 같이 이미지 자체가 구성되는 방식이라기 보다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현실에 대하여 객관적이고자 하는 감독의 태도와 영화 공동체에서 정한 규약에 대한 감독의 커미트먼트에 달려있는 것이다이는 마치 문학에서 리얼리즘 소설이 고정된 한 시점으로부터 허구를 통해 진실을 리얼하게 투시하는 3인칭 시점으로 객관적인 묘사에 치중하려던 것과 같은 방법인 것이다구체적 시점이 객관적인 것을 그릴 수 있다는 신념즉 어떤 구체성이 항상 어떤 일반성(보편성)을 상징하고보편을 그릴 수 있다는 신념-리얼리즘-에 바탕을 두는 태도인 것이다이러한 태도는 세계 자체의 이질성이 동일성 속에 편입되어 하나의 방향과 중심에 기초한다라는 시점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다큐멘터리이게끔 하는 것이 현실에 바탕을 둔 이미지의 객관적 구성이 아니라면그것은 이미지 자체를 구성하는 주체의 조건과 능력에 달린 것이다요는 시점즉 주체의 문제인 것이다경험적인 데이터가 사실성을 보증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인식적 틀이나 가설이 경험적인 데이터를 불러 모으는 것이다칸트식으로 말하자면 대상은 “인간 감성의 형식과 오성의 카테고리에 구성”되는 것이므로 객관의 문제는 대상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주체가 대상과 관계하는 방식에 기초한다., 이런 맥락에서 주관이란 심리적인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의 내부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즉 우리가 어떤 시스템이나 패러다임또는 에피스테메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자기인 것이고심리적인 자기나 내적인 확실성을 대상화 시키고 의심하는 선험적 주관인 것이다그러므로 다큐멘터리적인 대상은 패러다임이나 에피스테메가 내면화 시킬 수 없는주관으로 내면화할 수 없는 외부로서 대상일 수 밖에 없다이 대상이란 그저 우리에게 불확실한 어떤 형식으로 구성된 것일 뿐인 것으로 존재한다.

 청계천 메들리 감독으로서 박경근에게 청계천은 내면화될 수 없는 대상이고감독 본인은 또한 대상을 바라 보는 자신 스스로를 대상화 하여 다큐멘터리적 대상과 만나는 그 지점에서 촬영을 하고 편집을 했다청계천의 바깥에서 온 감독은 청계천 사람들로부터 뭘 찍을 게 있냐고 놀림이나 조롱을 당하기도 하고이곳의 죽음을 찍어보라는 비아냥까지 경험하면서 그 경험마저도 대상화하고 있는 자신을 나레이션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이를 통해서 관객은 청계천이 주체가 되어서 거기에 나타난 감독을 대상화하는 것처럼 주체 자체가 타자화되는 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영화의 나레이터로서 나를 이미 감독은 대상화 시켜 타자의 시선으로 그 “나”를 이중적으로 구성하여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나가는즉 나를 초월적 장소에 밀어 넣고그 장소의 현실을 다큐멘터리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큐멘터리와는 매우 형식적으로 다른 구성이다.

통상적으로 다큐멘터리는 감독이 찍고 싶은 대상과 조우하면서 관찰하고 겪는 특수한 사례와 구체적 경험이 항상 어떤 사회적 일반성을 상징한다라는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즉 감독 자신이 보고 겪은 특수한 것을 생생하게 파악을 하여 기록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보편적인 것도 동시에 손에 넣게 된다는 믿음이 하나의 장치로 다큐멘터리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특수한 개인으로서 감독이 겪는 특수한 체험을 특수한 자기가 찍으면서도 그것이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믿지 않는다면또 그것을 본 관객이 영화 속에서 나타난 특수한 사례를 보는 경험을 통하여 마치 자신의 것 인양 사후적으로 체험을 할 수가 없다면 그토록 많은 다큐멘터리가 제작될 리가 없을 것이다감독 스스로가 자기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사람들이 볼만 한 것이고나아가 반드시 봐야 한다고 믿는 이유가 바로 이 구체적 작품이 감독 자신의 의도와 상관이 없이자기도 모른 채로 시대 상황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 믿음이 되풀이 되면서 고만고만한 다큐멘터리가 지속적으로 양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경근은 특수를 통해 보편을 획득한다는 상징적 사고의 자명성을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자기의 특수한 경험(악몽)을 대를 이어 전승되는 가족의 특수한 집단적 경험(아버지의 악몽), 그리고 그 악몽의 시발점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일본에 가서 고철상 운영)에 이어 붙이고그런 자신의 가족사를 뻔뻔스러울 만큼 노골적으로 한국의 근대사라는 한국의 일반적 경험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보고개별적인 것이 일반적인 것 속에 속해 있다는 리얼리즘의 신념이 전도되어도리어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의 한 예를 이루고보편적인 것을 위해 특수한 것을 구하는 것 같은 방식에 입각하여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그리하여 사실은 자신의 악몽부터 가족의 경험을 특수하고 구체적인 사례로 다루기 위해서 청계천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절부터 확연하게 진행된 한국 산업화에 대한 다양한 “사실적” 동영상을 끌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고려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불가사리 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와 애니메이션까지 끌어 들이고 있다이렇게까지 하면서 감독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감독 자신의 고유성뿐만 아니라 청계천이라는 공간의 특이성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단독성그리고 일제를 관통하여 청계천의 마지막 날까지 이어왔던 한국의 근대화를 통한 경험의 일회성에 대한 것이다.

청계천이라는 장소와 경험의 특이성과 일회성에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순신 장군이 칼을 휘두르셔야 했고돌아가신 할아버지께 편지를 써야 했으며엉성하고 어색한 자신의 목소리로 논문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같은 문어체로 나레이션을 깔아야 했고소음 같은 음악이 사용되어야만 했던 것이다어떤 구체적 표현이나 이미지가 본래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어떤 실체를 지시하고 있다는 상징적 자명성을 차단하고 배제하기 위해서 어떤 이미지가 끊임없이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애초에 어떤 것을 말하여 다른 것을 의미하는 장치인 알레고리를 사용하고 있다감독 자신의 악몽과 아버지의 악몽그리고 할아버지의 경험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청계천에서의 경험쇠를 “산업의 쌀”로 비유했던 조국 근대화의 집단적 경험일제 시대의 식민지 수탈을 위한 산업화심지어 철기 문명 자체에까지 심리적으로 동일화를 시키면서 청계천 메들리는 특정한 시점을 넘어서는 편재하는 시간,초역사적인 구조를 드러낸다그 구조에 대해서 감독은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로 된 나레이션을 통하여할아버지께 쓴 편지를 읽는 방식으로 “나”가 가진 위상을 투입하면서 이미지의 알레고리적 횡단이나 어긋남을 가져온다이렇게 마이크로한 세계와 매크로한 세계가 서로 조응하고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영화가 구성되어 있으면서도또 반면에 그들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어긋남 속에서 구조로서 환원될 수 없는 역사알레고리적 전이로 해소될 수가 없는 일회적이고 고유한 현실로서 청계천이 드러나는 것이다이 얼마나 다큐멘터리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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